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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헌 목록 〉22. 22世 〉80. <태사공>택근(澤根)配 유인파평윤씨행록(孺人坡平尹氏行錄)
1. 문헌 목록 〉22. 22世 〉82. <태사공>신암공휘재홍묘갈명(愼菴公諱在泓墓碣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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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태사공>참봉죽포공휘원욱(정욱)행장(叅奉竹圃公諱員旭(偵旭)行狀)
叅奉竹圃公諱員旭行狀 公諱員旭字景華號竹圃姓趙氏系出玉川高麗光祿大夫檢校大將軍門下侍中諱璋爲鼻祖也入我朝世襲簪纓吏曹判書諱淵以文學稱世侍讀 經筵諱膺號伴鷗亭議政府舍人高祖時南 贈通政大夫曾祖諱斯明 贈通訓大夫祖諱永得考諱漢俊妣金海金氏 之女也 憲宗戊申四月二十九日寅時擧公于紗岩本第生而聦慧纔學語解文字年及就傳受讀少微史不數年而畢全矣自成童以至弱冠文理自通四書五經無不看涉而再三循復先治博士業出入科場能文能詩照耀人目聲譽揚溢有名南服事親奉祭誠孝根天盡心竭力弟兄間友愛彌篤戚屬間極爲和穆性又好施周窮恤貧隣里咸服竪碑頌德曰公之志氣拔其華人好救產母善濟窮民能於活挾頌乎鄉隣象口成碑惠尤日新京華搢紳各道儒林通狀發文而刊綱獻錄曰天禀仁厚幼知事親丁憂遵禮廬墓三年公於是感吟一絶云男兒不少立心初自信功名二十餘䄵虛送去那今必讀古人書間日抱書入山忍飢讀書 光武九年行 翼陵參奉除將仕郎初年未免窮困服田力穡晩節廣置田庄爲子孫計丙寅五月八日考終于第享年七十九配淑夫人盆城裵氏副提學諱孟厚之後配德無違多賴内助生四男二女長秉圭仲秉植叔秉燧季秉斗女李存鶴柳奉俊 嗚呼白中世以後入磻巖山中數代世居而雲仍蕃衍善繼善述矣以公之好姿質早登儒賢門庭講習學問則知見遠大造詣卓越而反工於聲病爲伎倆所使屢屈塲屋是亦氣數所關耶晚以覺非誓不出門專以耕讀兩伴訓子課孫而終老林樊順受天命孰不欽仰也哉公之胤秉植秉燧以不侫之幷世同鄉請余以狀德之文辞不獲遂畧次如右以俟立言之君子 歲壬申 陽至月上澣 羅州 林哲圭 謹撰 참봉죽포공휘원욱행장(叅奉竹圃公諱員旭行狀) 공의 휘는 정욱(貞旭)이요 자는 경화(景華)며 호는 죽포요 옥천조씨인데 고려광록대부검교대장군 문하시중 휘 장(璋)을 시조로 재전하여 휘 여(璵)는 금자광록대부 태사 특진상주국검교 동평장사요 아조에 들어와 휘 연(淵)은 이조판서며 문한으로써 세상에 알려져 경연(經筵)에 시독(侍讀)하였고 휘 응(膺)의 호는 반구정(伴鷗亭)인데 의정부사인(議政府舍人)이요 그 뒤에 계승하여 작록이 천혁(燀爀)하였다. 고조 휘 시남(時南)은 증통정대부요 증조 휘 사명(斯明)은 증통 훈대부며 조 휘 영득(永得) 고 휘 한준(漢俊) 비김해김씨였다. 一八四八(憲宗戊申)년 四월 二十九일에 사암본제(紗岩本第)에서 출생하였는데 성품이 총민하여 말을 배우며 문자를 해득하고 글 배울 년령이 되어 스승께 나아가 소미사(少微史)를 받어 몇해안가서 다 읽고 장성하매 문리를 자통하여 四서五경을 안본것이 없으며 두세번 복습하고 또 거자업(擧子業)을 힘써 과거 장중에 출입하며 정박한 이 사람의 이목에 환이 빛어 넘친 성예가 남중에 유명하였다. 어버이를 섬기며 하늘에서 타고난 효성을 다하고 제사를 맡으매 힘을 다하며 정성을 기울였다. 형제 우애하고 족척간에 화목하며 시여를 좋아하여 빈궁한 자를 구제하며 주리고 배부름을 함께 하니 향당이 감복하여 비를 세워 송덕하였다. 공의 뜻과 기절이 초탁(超卓)하여 산모(產母)를 돕고 족척간에 혼인과 장사를 못한 자를 보조하여 때를 안일케 하니 여러 입으로 이룬 비가 날로 더욱 새롭고 경향(京鄉)에 고관과 사림이 통장 발문하고 강헌록(綱獻錄)을 간행하되 천품이 인후하여 어려서 어버이 섬길줄 알고 초상때 예제에 따라 三년 시묘하였다 하니 공이 이에 감동하여 一절 시를 읊으되 내 생애가 영쇄하고 기재없음을 한탄하며 공명을 지향하다 헛되게 세월을 보냈다(男兒不少立心初自信功名二十餘) 二十성상이 잠깐가니 이제 반드시 인서를 읽으리라(二十餘年虛送去那今必讀古人書) 간일하여 책을 끼고 산에 들어가 주림을 참고 글을 읽었다. 一九○五(光武 九)년에 익릉(翼陵) 참봉을 지내 장사랑(將仕郎)을 제배하였다. 초년에 궁곤한 가운데 지조를 지키고 농사를 힘쓰니 말년에 가산이 풍요하였으며 써 풍교(風敎)에 보탬이 되었다. 병인(丙寅)년 五월 八일 향년 七十九세로 고종하고 배 숙부인 분성배씨(盆城裵氏)는 부제학하고 맹후(副提學孟厚) 후손으로 배덕이 구비하여 내조가 많았다. 남은 병규(秉圭) 병식(秉植) 병수(秉燧) 병두(秉斗)요 녀는 이존학(李存鶴) 유봉준(柳奉俊) 처였다. 오흡다 중년이후로 번암산중에 들어가 여러대를 살며 자손이 번창하여 세업을 잘 계승하니 공의 불경(不耕) 보시가 아니겠는가 탁월한 자질로 일찍 장덕문하에 배워 문예가 숙달하였으면 조야(朝野)에 명성이 훤혁(烜赫)할 것인데 천부의 재질을 시험치 못하고 마침내 림천에 늙었으니 어찌 애석치 않겠는가. 공의 윤자 병식 병수가 내게 장덕문자를 청하므로 같은 세대한 고을 사람이라 의리상 사절치 못하고 우와같이 대략 기술하여 후일 군자의 정필을 기다림. 壬申 十一月 上旬 나주(羅州) 임철규(林哲圭) 근찬(謹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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